1. 불변의 자세로 나를 반기는 숲과 식물

글 | 이정섭 아름드리 나무들은 수백 년을 자랑하는 나이를 지녔음에도 늘 자태를 뽐낸다. 고궁의 담장 안에는 많은 보살핌 속에서 살지만 그 나무들은 대기의 바람이 항상 몸을 감돌아 힘겹게 버틴다. 덕유산의 잣나무 자태와는 사뭇 다르다. 싱싱하고 올곧게 쭉 뻗은 몸이 색깔에서부터 피가 힘차게 감도는 것 같이 생명력이 강하게 보인다. 구김살 없이 자란 재목은 언젠가는 그 소임을 다하고 영원히 이 땅에 남아 너희 동물들 자자손손이라도 내가 봐주마 하고 늠름히 서 있다. 허리가 아파 나무에 부딪치면 좋다기에 고궁의 늙은 나무에 엉덩이와 등을 쾅쾅 부딪쳐 본다. 아무리 덤벼도 꿈쩍도 안 하지만 내 등은 시원하다. 사시사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 자세로 반긴다. 동물은 이동성에서 삶의 해결을 이루지만 식물은 한 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불변의 자세여서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반긴다.

2. 자연과 벗하는 즐거운 시간

어느 날 낮잠을 즐긴다는 게 오후 내내 깊은 잠에 빠져 해를 꼴깍 넘긴 일이 있어 미화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남의 신방에라도 자다 나온 듯 계면쩍어 하는 내 모습을 미화원은 그냥 넘기지 않는다. "약주가 과하셨나 보군요."가 아니면 "허허 집에 가서 주무셔야죠."하듯 나를 깨워놓고는 휘적휘적 다음 코스로 걸어간다. 참나무 잎이 아늑한 침상이 되고 따뜻한 품이 나의 취기를 감싸주다가 후다닥 뛰어나가는 나를 보고 얼마나 웃었을까. 그러건 말건 또 가서 털썩 주저앉아 어제의 일은 까맣게 잊고 처음 간 것 같이 포근하게 파고든다. 봄날 잎이 나오는 모습에서 가을 잎이 떨어지는 모습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만나려고 그들 속으로 염치 불구하고 달려드는 나를 반긴다. 어떤 날 품 속 안주머니에 소주병을 깊숙이 넣고 미화원 몰래 가져와서 혼자서 홀짝홀짝 마시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그래도 ?은 날에는 옆에 착 달라붙은 친구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엉덩이를 붙이면 냉큼 일어서지 못하고 몇 시간을 보낸다.

3. 숲이 주는 한결 같은 애정

동물들은 주고 받는 맛에 정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숲은 언제나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인다. 불쌍한 사람, 무겁고 지친 몸 쉬었다 가게나. 내 사는 곳이 심산유곡이면 너의 뼈까지 받아들이지만 한가지 여기는 그걸 못 받아주니 미안하다는 듯이 위만 보고 서 있는 불그스레한 소나무는 언제나 기대고 싶은 믿음직한 기둥으로 서 있다. 이제 한 해 두 해가 가고 나도 이승을 떠나야 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고 나를 따라 여기 온 친구들 저승에 간 이의 숫자가 늘어나니 자꾸만 쓸쓸한 생각이 든다.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 하는 이승, 이 나무는 내 수명의 몇 배를 살게 아닌가. 내 자식도 반기고 내 손자도 반길 것 생각하니 아무리 애정이 깊은 이도 이 적송과 같이 한결같이 반길 수가 있을까 싶다. 내 앉았던 자리에는 내 모양대로 자리모양이 남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바람과 비가 말끔히 청소해 놓고 나를 기다린다. 항상 조용히 나를 반긴다. 북한산의 끝자락 고궁의 담장 밑의 숲은 영원한 내 친구들, 저 자동차 냄새만 없어져 줬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쉽다